죽어도 죽지 않고 수필가로 태어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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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음교실 수강생 서광식 작가(필명 서적)의 다시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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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일과 삶의 베이스 캠프 서울시도심권50플러스센터
서울시도심권50플러스센터는 올 2학기 과정으로 지난 5월에서 7월까지 「인생설계아카데미」를 주관했다.
그 일환으로 내 삶을 담은 에세이를 써보고 싶은 50플러스 세대를 대상으로 「글이음교실」이 열렸다.
서광식 작가는 이 강좌의 수강생으로 참여했고, 이곳에서 귀인을 만나 수필가로 등단하게 된다.
1991년 이미 시인으로 등단한 바 있는 서 작가에 있어 문인등단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수필가로의 등단은 그동안의 삶의 상처를 아물게 해주고, 죽어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이유를 제시해 주었다.
▲서울시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찾은 작가 서광식 / 시인, 수필가
■ 「글쟁이」도 아니고, 「글쟁이가 아닌 것」도 아닌 나는 누구인가
서광식 작가는 별정직 공무원이었다. 국무총리실 연설담당관으로 1996년부터 2017년까지 근무했다.
이수성 총리부터 현 이낙연 총리까지 많은 총리의 스피치라이터 역할을 해 왔다.
“계절이 변하든 말든, 시간이야 흐르든 말든, 밤이나 낮이나 채 한 평도 안 되는 책상에 엎어져 꾸역꾸역 글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스피치라이터로서 아무개의 입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아무개가 어느 날 바뀌어 입을 바꾼다고 할 때 입이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글 쓰는 일이 버릇이고 생활이 된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글 쓰는 일을 잃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동안 수많은 글을 써 왔지만 정작 그의 글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자기 글이 없는 글쟁이도 있냐?”고 반문도 해 보지만 서 작가는 자기 글이 없는 글쟁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점에 글쟁이로서 정체성의 혼란마저 느끼게 된다.
▲수필 등단작이 게재된 「에세이스트」지(2019년 7-8)
■ 등단작 「죽어도 죽지마라」는 그의 삶을 담은 에세이
직장생활을 함께했던 무리 속에서도 그의 존재는 잊혀졌다. 시간 속에 묻혀버린 소중한 과거마저 캐내기도 전에 송두리째 씻겨 나가버린 느낌이었다.
글쟁이가 펜을 놓고 난 후 대상포진도 오고, 우울증도 왔다. 자신을 인정할 수 없는 심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나는 죽었다”는 그의 표현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계속 세상에 노출되고 말았다.
▲서광식 시인을 수필가로 등단시킨 데뷔작 「죽어도 죽지마라」를 여는 글
■ 뼛속까지 글쟁이 서광식 작가
서광식 작가는 퇴직 후 시간 활용을 위해 강의하는 곳을 찾다가 5월경, 우연히 서울시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 수필 강좌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 1회씩 6주에 걸쳐 진행되는 「글이음교실」이었다. 이곳에서 서 작가는 「글이음교실」의 김종완 강사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김종완 강사는 문학평론가이며, 수필가, 그리고 격월간 에세이스트지 발행인이다.
「글이음교실」에서는 수강생들이 본인 얘기를 주제로 한 수필을 써내기로 했고, 서 작가는 뒤늦게 제출하게 됐는데,
그의 글을 보고 김종완 강사가 서 작가의 수필가 자질을 발견하게 됐다.
서 작가는 이후 3편의 자신의 작품을 추가로 보냈고, 격월간 에세이스트지를 통해 그는 정식으로 수필가로 등단하게 된다.
서 작가의 자질은 이미 학창시절부터 그 가능성을 보였다. 1979년 고등학교 3학년이 되는 첫날,
「만해백일장」에서 시제 「님」으로 시 부문 중고등부 장원에 오른다.
고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한 서 작가는 당시 학생들이 많이 애독하던 「학원」 잡지에 그의 작품과 이름을 많이 올렸다.
중국어를 전공했던 대학 시절에도 그는 문학 써클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의 아들(서기웅)도 아버지를 닮아 문학적인 소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2011년도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문학계에서 보기 힘든(아마도 처음일 수도 있는) 부자시집을 냈다.
시집 이름은 「만리동 고개를 넘어가는 낙타」이다. 만리동은 그가 살고 있는 동네다.
▲서광식/서기웅의 부자시집(2011년)
■ 이제 다시 글쟁이로 내 글을 쓰며 살고 싶다
서광식 작가는 현재 50플러스 포털 내 「50플러스 매거진」에서 전문 필진의 한 분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내 오래된 책장-시를 찾아서」라는 코너에 그의 글을 올리고 있다. 또한, 남부 캠퍼스에서는 「내 생에 시 한 편」이라는 강좌를 7월부터 맡았다.
이제 그는 글을 계속 쓰고 싶다. 글은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재능과 소질을 개발할 수 있는 방향에서 노력을 계속하고자 한다.
“육십 가까이 되도록 살아오면서 글 쓰는 일밖에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싫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글에 의지하지 않고는 어떤 도리가 없다.
되돌릴 수 없다면, 앞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글이었다. 아니 글이어야 했다.”
이제 글은 다시 그에게 돌아왔다. 그의 말처럼 “천성이 아둔하고, 굼뜨니 꾸역꾸역 쓰고 쓰고 또 쓸 따름”이다.
그의 필명 서적(徐積)은, 천천히(천천히 할 徐), 그렇지만 꾸준하게(쌓을 積) 정진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자신의 글을 위해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계속 글을 쓰겠다는 의지가 필명에서조차 느껴진다.
시나 수필이나 또 다른 장르의 글이라도 이제는 남의 글이 아닌 자신의 글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래서 진정한 그의 글을 이루어 놓기 전까지는 그는 「죽어도 죽을 수가 없다.」
시인이며 소설가인 이상의 소설 「12월 12일」 끝 부분의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는 문장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다.
▲서광식 수필가의 작품 「죽어도 죽지마라」의 마지막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