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認知) 저하(低下) 관련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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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작별하는 가족 이야기 <조금씩, 천천히 안녕長いお別れ(A Long Good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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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적지 않지만, 50+세대가 으뜸 관심 가져야 할 것은 고령화 문제일 것이다.
1995년에 세계 최초로 고령사회(65세 인구가 전체의 14%를 초과하는 사회)에 진입했고, 2014년에 초고령화 사회(65세 인구 비율 21% 초과)에 들어선 일본은 로봇 등을 활용한 고령 산업과 어르신 전문 마케팅은 물론, 의학 용어 개선과 대중 매체를 통한 계몽도 활발하다.
우리나라에선 어리석을 치(癡), 어리석을 매(呆)를 합친 치매(癡呆)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는 바보나 멍청한 정신 상태라는 뜻으로, 경멸과 부정 인식이 깃들였다는 지적에 따라, 일본은 2004년부터 의학 용어로 인지증(認知症)을 택하고 있다.
식모를 가사도우미로 바꾸었듯, 용어 선택 하나로 인식이 달라질 수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치매(癡呆)를 금했으면 한다.
덜 위협적이며 긍정적인 단어로 바뀌었으면 하는 뜻에서, 본고(本稿)에서만이라도 인지(認知) 저하(低下)란 표현을 쓰고 싶다.
참고로 대만은 2001년부터 실지증(失知症), 홍콩은 2010년부터 뇌 퇴화증(腦退化症)이라 명명하고 있단다.(이상 조선일보 치매 관련 시리즈 보도 참조)
당연히 일본에는 인지증 관련 영화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현대 일본 영화의 흐름 중 하나인 지나치게 착한 가족 영화, 느린 영화들이라 비현실적이고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지만, 노년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고 의미 있게 보려고 노력하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번 회에 소개할 <조금씩, 천천히 안녕長いお別れ(A Long Goodbye)>도 마찬가지다.
영화사 제공
나카노 료타中野量太 감독의 2009년 작 <조금씩, 천천히 안녕>은 2007년 가을부터 2년 단위로 가장 쇼헤이(야마자키 츠토무山﨑努)의 인지증 저하 진행과 이를 지켜보는 아내 요코(마츠바라 치에코松原智恵子)와 두 딸 - 남편, 아들과 함께 미국에 사는 장녀 마리(다케우치 유코竹内結子)와 요리사가 꿈인 차녀 후미(아오이 유우蒼井優)- , 그리고 사위와 손자의 성장을 담백하게 그린다.
7년 동안 엄청난 재난과 사회적 격변 -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 결정 발표 등 - 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일상은 큰 소동 없이 흘러간다.
마디 지우듯 연도와 사건에 대한 뉴스와 언급이 있을 뿐,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소재로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큰 재난이나 뉴스도 삶의 배경으로 지나갈 뿐이라는 달관이랄까 체념이랄까, 일본인 특유의 차분한 정서가 깔려 있다. 호들갑 떨지 않는 적요(寂寥)가 못내 부러울 지경이다.
아버지 친구의 장례식, 어머니의 눈병 수술과 입원, 장녀 부부의 갈등, 차녀의 거듭되는 사랑과 일 실패, 손자가 미국에서 겪는 차별 등 가족 모두 이런저런 고민이 있지만, 그 또한 천변 물처럼 흐른다.
가족들은 마음의 상처를 혼자 말하듯, 혹은 눈물을 쏟으며 가장/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인 쇼헤이에게 털어놓고, 선문답하듯 불쑥 던지는 쇼헤이의 대꾸에 위로받는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다소 떨어져 핵심만을 볼 수도 있다며, 자잘한 일에 그리 애 끓일 필요 없다는 교훈이라고 할까.
현대 일본 영화의 또 다른 흐름 중 하나인 요리와 식사 장면이 많아 <조금씩, 천천히 안녕>을 음식 영화로 소개해도 크게 흠 잡히지 않겠다.
남자 친구와 헤어지며 만들어주는 계란말이, 아버지의 70회 생일 케이크에서부터 유기농 채소 식당과 카레 전문 푸드 트럭의 메뉴 개발, 자매가 카페에서 만날 때마다 먹는 아이스크림과 차, 동거남의 딸을 위한 쿠키 만들기, 옛 남자 친구가 농사지은 감자 택배 등등.
영화를 보는 동안 어찌나 먹을거리가 많이 등장하는지, “그래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은 잘 먹고 견디면 되는 거야.”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게 아닌가 싶다.
책과 노래 또한 중요한 소통 매개체로 등장한다. 손자는 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쇼헤이를 ‘한자(漢字) 마스터’라며 존경하는데, 이런 설정을 잘 활용하여 나쓰메 소세끼(夏目漱石)의 《마음(心)》을 비롯한 경영학 입문서, 국어사전,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등장한다.
책을 읽다 덮을 때, 잘 말린 은행잎으로 갈무리하는 장면을 반복해 보여주어 독서의 품격, 소중함을 강조한다.
어머니와 장녀가 남편/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집을 방문했을 때, 사카모토 큐(坂本九)가 부른 일본 국민가요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를 함께 부르는 장면에선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다.
‘위를 보고 걷자 눈물이 넘쳐흐르지 않게’라는 가사와 단순한 선율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용기를 잃지 말자는 씩씩한 메시지를 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선곡이 아닐 수 없다.
기저 소재인 인지증에 관해서는 가장의 가출 소동으로 인해 가족들이 위치 추적기를 달까 말까 하는 의논, 35년을 산 집에 살고 있으면서 자꾸 집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거나, 슈퍼마켓에서 왕귤사탕 훔치기 등의 에피소드로 가름한다.
가장의 인지증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인데, 현실의 어려움 묘사보다 인지증 저하 어르신에게도 그만의 삶과 인격이 있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 같다.
영화 배경은 도쿄 남서부의 다마시(多摩市). 대도시가 아닌 지방 도시의 정서, 특히 일본 청춘, 가족 영화에 흔히 나오는 방죽이 있어 한가로운 영화에 잘 어울린다.
나카지마 교코中島京子가 2015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은 인지증 아버지를 모셨던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단다.
“인지증을 다룬 작품은 간병하는 가족의 어려움을 그린 것이 많더라고요. 겪어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웃음을 자아내는 순간도 일상에 가득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던 일상의 소중한 순간들을 소설로 따뜻하게 담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고 작가는 밝혔다.
베이비부머 세대 노령화로 고령 사회에 이미 진입했고, 초고령 사회를 앞둔 대한민국. 2045년이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 고령 국가가 될 거라고 한다.
전 세계 평균의 3배로 빨리 늙는 국가 대한민국의 가족들도 <조금씩, 천천히 안녕>의 가족처럼 착한 돌봄과 품위 있는 작별을 실천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