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향교」와 「열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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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타고 문화재 보러 가기
조선 시대에는 중등 교육기관인 「향교」가 지방에 있었다. 같은 시대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 (사학)이었고, 「향교」는 관립 교육기관(관학)이었다. 현재 서울에서 향교는 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강서구 양천로에 있으며,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이곳 양천향교는 조선 태종(1411년 경) 때 세워졌으며,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여인을 기리는 「열녀문」이 있었다. 이 「열녀문」도 서울 에서는 양천구 신월2동 한 곳에만 남아 있다. 조선 영조가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열녀문을 보려면 지하철 2호선 신정네거리역 2번 출구로 나와 신월동 방향으로 10분만 걸어가면 된다.
■ 전국 향교 234곳 중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향교
조선시대에는 한양에는 4부 학당(동부학당, 서부학당, 남부학당, 중부학당)이, 지방에는 향교가 관립 교육기관으로 존재했다. 서당에서 글을 깨우치며 소위 초등교육을 마친 학생들이 입학했던 중등 교육 기관들이다. 고등교육기관은 성균관으로, 4부 학당이나 향교에서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수학했다.
향교는 관립 교육기관으로 지방관청에서 관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 양천향교의 관리자 및 교수들은 모두 지금의 교육 공무원인 셈이다. 양천향교 주변에는 과거 양천현아가 있었고 지금은 양천현아 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표지석만 남아 있다. 양천현은 겸재 정선이 한때 현감으로 있었던 곳으로 그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많은 미술 작품들을 남기기도 했다.
양천향교 입구에 있는 양천현아 터 표지석
양천현아 터 표지석 오른편에 있는 양천향교
■ 배움의 공간과 제례 공간이 함께 있는 향교의 구조
양천향교를 가기 위해 9호선 지하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로 나오면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 개하마)’라고 새겨진 「하마비」를 볼 수 있다. 이 「하마비」는 궁궐 앞에 놓여있는 것으로,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담고 있어, 동 장소가 신성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장소라는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향교와 같은 교육기관 앞에도 이러한 하마비를 놓아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고 있다. 성균관대학 정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조선 영조 때 세운 탕평비각과 함께 「하마비」가 놓여있음을 볼 수 있다.
양천향교 입구에 있는 하마비(1번 출구에서 연결)
성균관대학교 정문 탕평비각 옆 하마비를 볼 수 있다
하마비를 지나 양천초등학교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양천현아 터가 나오고 양천현아 터 오른편 절(홍원사) 골목길을 따라가면 양천향교가 나타난다. 양천향교의 내부는 일반 향교와 마찬가지로 배움의 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대성전(大成殿)으로 나누어져 있다. 향교 위치에 따라 명륜당(明倫堂)과 대성전(大成殿)의 위치는 전후를 달리한다. 예를 들어 향교가 평지에 있는 경우는 보통 제례 공간인 대성전이 앞에 있고, 장학 공간인 명륜당은 뒤에 배치되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로 있다. 양천향교는 산(궁산)을 끼고 있으며 비탈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배움의 공간이었던 명륜당
중앙이 명륜당으로 배우는 공간, 오른편(동재)와 왼편(서재) 건물은 기숙사와 같은 시설
■ 교육기관의 기능이 약해지고 문묘 기능 중심으로 변화
명륜당에서 수학한 과목은 4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와 5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으로, 수령(양천향교는 양천현감)은 배운 내용과 일과를 매월 관찰사에게 보고해야 했다. 이곳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 합격자는 생원, 진사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1894년(갑오경장)에는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향교는 유학을 토대로 한 교육기관의 의미는 없어지고, 문묘의 기능만 남게 된다. 이곳 양천향교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공자를 비롯해 4성위와 송조4현, 아국18현의 위패까지 총 27인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갖는다. 이를 석전대제(釋奠大祭)라고 한다. 강서구청장이 초헌관(初獻官)으로 석전제를 올린다.
양천향교 대성전으로 연결되는 내삼문
대성전 내부 모습과 성현들의 위패
■ 충신, 효자, 효부, 열녀 표창의 상징 정려문(旌閭門)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충신, 효자, 효부 그리고 열녀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는 정려문을 그 집 앞에 하사하였다. 정려문은 이들을 표창하고,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한 상징물이 됐고, 「열녀문」은 정려문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열녀문」은 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양천구 신월동 장수공원이 있는 주택가 입구에 있으며, 이곳은 지난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릇 「열녀문」에는 사연이 담겨 있기 마련인데, 이곳 「열녀문」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숭정각과 열녀문
양천구청이 세운 열녀문의 내용을 담은 표지석
■ 열녀문의 주인 全義李氏의 사연
「열녀문」의 관리 주무관청인 양천구청이 설명하는 사연은 다음과 같다. 열녀문을 소장하고 있던 原州元氏 집안 구전에 의하면, 이 문의 주인인 전의이씨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하여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훗날 원정익(元鼎翼)과 혼인한 후 행복하게 살았는데, 갑작스럽게 남편에게 중병이 생겼고, 지극한 정성에도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전의이씨는 남편을 생각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 대상(大祥: 죽은 뒤 2년 만에 지내는 탈상제)을 지낸 후 20세 후반의 젊은 나이로 단식사(斷食死)함으로써 남편의 뒤를 따랐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영조 5년(1729년)에 정문(旌門)을 세워 부인 이씨의 높은 뜻을 기리었다고 전해진다.
2004년에 열녀문은 전의이씨의 10세 손이 신월동 집에서 보존해 오다가 양천구청에 기증했고, 양천구청은 널리 일반에게 알리고자 숭정각(崇旌閣)을 지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보존하고 있다.
숭정각 내 열녀문에 기록된 내용. 「열녀학생원정익처유인전의이씨지문」이라고 씌어 있음
■ 주택가와 공원을 끼고 있는 서울의 명소
양천구 신월동의「열녀문」은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어 찾기도 쉽다. 또한, 주택가 입구에 있고, 주민들의 휴식공간인 장수공원을 끼고 있어 노출효과도 뛰어나다. 장수공원 산책길을 걷다 보면 오며 가며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바닥이 푹신해서 걷기에 쾌적한 느낌을 주는 산책길을 따라 도보여행 겸해서 열녀문을 참관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열녀문은 그동안, 책을 통해, 그리고 TV 사극 등을 통해 많이 들어 보았지만, 실제로 본 기억은 별로 없을 듯하다.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않은 열녀문이라 한번 직접 가서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찌 보면 당시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을 장려했던 상징물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열녀문」 자체가 말해주는 역사의 울림과 떨림은 나름대로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열녀문은 대로변에서도 금새 찾을 수 있다
열녀문 뒤로 쾌적한 산책길이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