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에도 역시 사상 최고의 온도를 기록하며 폭염이 다가왔다.

 

폭염은 마치 날카로운 도구처럼 가슴팍과 등짝을 파고든다. 그럴 때마다 흘러내리는 땀. 땀은 체온을 식히기 위한 체내 면역시스템의 완벽한 작동이다. 그러나 한여름 땀은 끈적끈적 하고 불쾌하기 그지없다. 장마가 겹치면 불쾌지수가 올라간다. 폭염과 습기로 인해 체력은 바닥난다. 우리 선조는 이런 날을 대비하기 위해 삼복을 정했다. 떨어진 기운을 고칼로리의 고기를 먹으며 보충하고자 했다. 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요즘은 영양이 과하다 못해 넘친다. 오히려 많은 50+들이 과다한 영양으로 인한 혈당관리의 실패로 좌절하고 있다. 그러니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고칼로리를 맛보는 노력은 아니 한 만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친 50+에게 의미 있는 한여름 힐링 방법엔 무엇이 있을까. 청계천을 한 바퀴 돌고 덕수궁 옆 시립미술관에 들러 팝아트 몇 점 관람하면, 요새 말로 충혈된 안구라도 정화시킬 수 있을까. 남산 정상에 올라 코리아윈드 오케스트라의 빠르고 장엄한 선율에 귀 기울이면, 케케묵은 딱지처럼 귀속에 내려앉은 소음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이도 저도 아니면 TV와 선풍기 모두 켜 놓고 거실에 누워 가장 편안한 자세로 골라 보는 맛에 푹 빠져, 한껏 늘어진 시간 위에 게으른 내 몸뚱이를 올려보는 것은 또 어떨까.

 

 

“아빠, 토요일에 조용한 수목원에나 다녀오세요.”

 

 

막내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 있다. 일거에 고민은 중단됐다. 한여름과 수목원 그리고 힐링을 원하는 50+.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조화가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얼마 전에 아이들과 아침고요 수목원에 다녀왔다. 넓은 산을 가꾸어 각종 나무와 꽃으로 장식했다. 공기는 투명하고 맑았다. 모처럼 폐부 깊숙이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차는 느낌을 받았다. 관광객들도 많았다. 넘치는 인파에 주차장이 협소하여 짜증도 났지만 세속에 시달린 내 몸뚱이를 정화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두 세 시간쯤 걸었으니 그날 필요한 운동량도 목표를 달성했다. 저절로 밥맛도 좋을 수밖에 없다. 숙소로 돌아와 고기도 좀 굽고 몇 가지 채소도 올렸다. 모두 쌈을 사서 한입 가득 아귀아귀 먹던 기억이 난다.

 

비를 걱정하며 잠이 들었다. 새벽에 비가 내렸다. 창문 넘어 흘러들어 오는 햇빛을 보면 느낄 수 있다. 빛과 공기가 깨끗하다. 우산과 물을 챙겼다. 차는 남양주 별내면에 위치한 산들소리 수목원을 향했다. 사람들은 모두 휴가철을 맞아 바캉스를 떠난 게 틀림없다. 거리는 한적했다. 차의 속도가 빨라졌다. 참 편한 세상이다. 네비게이션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산들소리 수목원 주차장으로 인도했다. 주목할 만한 4차 산업으로 자율주행차량이 있다. 이른바 무인자동차이다. 이제 곧 대중화될 수도 있는 자율주행차량을 타고 왔다면 얼마나 더 기술의 발전에 놀랐을까.

 

 

산들소리 수목원은 불암산과 수락산 아래 야트막한 자태로 누워 있다. 누군가가 이 산의 주인이겠고, 그가 오염된 대도시의 시민에게 안락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수목원은 꾸며졌으리라. 생각만큼 방문객이 없다. 모두 입장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지만 곧 넓은 산 위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 두 산의 정상을 올려다보고 있음을 알았다. 시커먼 비구름이 산을 넘다 허리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썰렁하다는 말은 이때 써야 어울릴 듯한 광경이다. 바람에 루드베키야의 노란 화관이 흔들린다. 하얀 안개꽃도 입을 빼죽이며 바람에 몸을 맡긴다. 

 

 

비가 와서인지 입구에 작은 폭포가 흐르는데 불암산 폭포라는 팻말이 세워져 썩소를 자아낸다. 물방울이 모여 떨어지면 모두 폭포다. 하긴 이름 못 붙일 것도 없다. 한쪽에 서서 뱃속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 뿜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넓은 수목원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힐링이 아니라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이 든다. 꽃이 그랬던 것처럼 바람에 잠깐 나를 맡겼다. 그러나 구름사이로 햇빛과 함께 밀려오는 한낮의 폭염은 역시 사나웠다. 우산을 펴들고 부채를 연신 흔들며 팬지꽃으로 붉게 장식한 오솔길을 따라 산꼭대기로 향했다. 수목원 주인은 소심한 성격이 분명하다. 웅장하고 거대한 느낌이 드는 시설물은 없다. 마치 아이들을 위해 만들기라도 한 듯 아기자기하고 꼼꼼한 설계가 이곳이 수목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어쩌면 방문객이 없는 이유가 단지 휴가철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힐링치유센터라고 크게 써 붙인 간판이 무색하게 출입문은 굳게 잠겨있다. 방문객을 위해 만들어놓은 수도꼭지는 끝없이 돌려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줄지어 늘어선 꽃과 나무가 말한다. 모처럼 사람을 본다는 투다. 수목원의 방문객은 나였지만 관람객은 꽃과 나무였다. 힐링은 나의 몫이지만 오히려 나를 본 꽃과 나무의 희색이 너무 새파랗게 힐링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헛웃음이 나왔다. 젊은이들의 표현대로라면 ‘웃프다’는 말이 가장 잘 맞는 표현일 듯하다. 내친 김에 구석구석 발품을 팔아보았다. 그래도 입장료를 팔천원이나 냈는데 최소한의 볼거리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였다. 빗물을 머금은 꽃향과 목향이 어렴풋이 남아있지만 설렘은 사라졌다.

 

 

시간이 되었으므로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유일하게 우뚝 선 식당이 괴물처럼 다가섰다. 처음으로 거대한 시설물에 마주친 것이다. 식당 안에 손님은 없다. 연잎갈비정식을 주문했다. 힐링을 위한 유기농 식단이었다. 막 무친 씁쓸한 도라지생채와 참나물은 한여름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주기에 충분했다. 다행이다. 연근을 머금은 연잎밥에서 풍기는 알싸한 연잎 냄새도 폭염에 지친 몸의 피로를 풀어준다. 맞아 이 정도면 호사 아닌가. 서울의 동쪽을 지키는 불암과 수락 두 산을 홀로 가슴에 품었으니 장부의 기개 이정도면 족하지 아니한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역시 한적했다. 그래 모두 바캉스를 떠난 것이 틀림없어. 헛헛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