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흐름은 ‘씻음’이라는 ‘승화(昇華)

 

상선약수 수선리만물(上善若水 水善利萬物). 최상의 선(德)은 물과 같아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 물은 모든 것을 포용하며 유유히 흐르니 세상 만사 이와 같은 이치라. 덕 역시 모든 것을 안고 보다 듬는 게 본질이리. 붓다가 중도(中道)에 대해 말하길, 강(江)의 양변은 서로 마주 보고 대립하며 절대 만날 일이 없다. 그러나 강을 흐르는 물은 대립하는 강변을 포용한다. 이를 ‘중도’라 한다.

 

성현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예서 말하고자 함은 물 그 자체가 아니라 물의 흐름을 ‘중도’라고 한 게 아닐까? 흐름은 곧 지양(止揚∙Aufheben), 대립과 모순을 끌어 안고 흐르며 녹여내고 점점 큰 물을 향해 흐르며 나아가는 것. 그래 두 성현 말씀의 본질은 물보다는 흐름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름 건방지게 해석해 본다. 물 스스로는 만물을 포용하지만 씻어내는 것은 물의 흐름이 그러하다고. 고이고 썩은 물은 ‘씻음’이라는 승화(昇華)를 할 수 없다.
물의 흐름과 같은 삶을 살고자 했건만 어디 인생이 뜻하는 대로 흐르던가? 세상만사 이치가 다 그런 것을, 하고자 매달리면 더 옥죄는 것이 삶. 그렇다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삶을 사는 평범한 이 그 얼마나 있을까? 최소 고인 물만 아닌 자연스레 흐르는 물과 같은 인생만 살아도 자연의 일부로 동화될 수 있으련만∙∙∙.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지 않는 삶만 살아도 말이다.

 

 

 


생활고(苦)에 글을 쓰고, 글쓰기를 접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생 걷을 수 없는 ‘업(’을 안고 있다고 했던가? 사주팔자, 운명 그 따윈 믿지도 않고, 또 의식하지도 않고 살아왔지만 다른 이에게 들려 오는 것이야 어찌하리. 여기저기서 왈(曰), 문(文)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생이라 했겠다. 또 관(官)과는 멀면 멀수록 좋다고 했던가? 정말 그러하였던가?
지금까지의 인생을 반추해 볼 때, 文은 글쓰기요 官은 권력이라고 억지로 단순화해 본다면 곱씹어 볼 만은 한 듯도 하다. 문화생활을 영위하긴 영 글러먹고 가족과의 생활 역시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는 고된 일이건만, 文과 官(힘)을 모두 갖춘 자리라는 자타의 암묵적(?) 인정 속에서 삶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며 뭇 사람들이 언론인의 삶을 꿈꾸고 또 행하며 살았으리.
그래 그 때의 그 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았음은, 그 힘(?)을 포기하고 접었음은 역시 ‘관’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 ‘업’ 때문이었을까? ‘관’을 뗀 글쓰기 생활이 ‘돈’과는 거리가 멀었음은 한때만의 모습이었을까? 생활고를 방패삼아 뜻을 접은 글을 썼고, 거꾸로 생활고를 핑계로 글쓰기에 거리를 두었던 시절.‘문’에 얽힌 ‘업’이 삶의 미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것일까?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

 

‘업’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즐겨라?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에 스스로의 삶을 맡겨라? 낙천론(樂天論)인가, 숙명론(宿命論)인가? 자의든 타의든 몇 년 동안의 글쓰기 생활의 포기는 정말 주어진 ‘업’에 역행하는 삶이었던 것일까?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보지 않았고, 즐기지도 않았고, 그 덕을 본 적도 없는데 정말, 다시 ‘문’과의 얽혀진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인가? 또 다시 찾아 온 글쓰기의 ‘업’
한동안 멀리하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이유로 인생과 ‘업’까지 들먹이다니 나이 탓이려니 하기엔 남우세스럽고 거창도 하다. 그냥 단지 자연스러운 물의 흐름처럼 끌어 안고, 보다 듬고, 때론 잔잔하게 때로는 거칠게 흐르고 싶었다. 이제 그 흐름에 삶을 내맡기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고 싶다. 좋음도 나쁨도, 슬픔도 기쁨도, 번뇌도 ‘업’도, 모든 모순을 녹여내어 안고서 흐르고 싶다. 물처럼, 흐름처럼 지양의 삶을 추구했던 그 옛날처럼 지금도 앞으로도 그러한 지양의 삶을 살고 싶다. 지양의 글을 쓰고 싶다. 물의 포용과 흐름을 가슴에 품고,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제부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