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깔리자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괜한 짓을 한 것 아닌가하는 자괴심을 떨치려고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와서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화두를 생각하면 벌써 보따리를 싸서 고적한 절에 들었어야 했다. 번뇌를 끝내고자 부모형제를 버리고 혼자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이르면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나 자신 하나도 어쩌지 못하면서 감히 세상을 구하겠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비록 전쟁이 끝나 모든 사람들이 절망에 사로잡혔어도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소리가 요란했다. 안주머니에 넣어둔 기차표가 저항하듯 뽀시락거렸다. 기차표가 잡히자 다시 용기가 생겼다. 두륜산에 올라 설렘으로 대흥사를 바라보며 가진 것 다 버리고 자유인이 되고자 했던 생각을 떠올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가자 서울로. 눈발사이로 길게 기적이 울렸다. 기적처럼 고향 땅끝 마을 해남도 어머니와 아버지도 함께 멀어졌다.

 

젊은이가 안국동 선학원에서 처음 마주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선승 효봉 스님이었다. 당시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던 5대 거승이 있었다. 동산, 청담, 금오, 성철 그리고 효봉 스님이었다. 대인이 대인을 알아본 것일까. 효봉 스님은 말없이 젊은이의 출가를 받아들였다. 젊은이는 삭발을 하고 승복을 걸쳤다. 박재철이라는 속명을 버리고 법정으로 태어났다. 제행제심조차 알 리 없는 젊은 법정의 모습이 영락없는 중이었다. 효봉 스님은 “구참이로구나” 하면서 껄껄 웃었다. 구참은 오래된 중을 일컫는 말이다. 승복이 잘 어울린다는 뜻일까 아니면 천상 중이라는 뜻일까. 법정은 고개를 저으며 중이 되었다는 기쁨에 종로통을 뛸 듯이 돌아보았다. 효봉 스님의 가르침은 두타행이었다. 수행자는 가난하게 사는 게 곧 부자살림이라고 했다. 걸레를 심하게 짜면 빨리 해진다며 살살 짜라고 했고 어쩌다 우물가에 밥알 하나만 흘려도 호통을 들어야 했다. 스승의 검소한 생활로 인해 법정의 무소유사상은 이미 이때부터 운명처럼 정해졌는지 모른다.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했던 효봉 큰스님은 밀양군 표충사 서래각에 머물던 어느 날 새벽 예불을 올리던 제자들에게 “나 오늘 갈란다”하고는 입적했다. 큰스님은 자기가 떠나는 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행은 오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풋중에게 깨달음은 쉬이 오지 않는다. 법정은 해인사 장경각에서 고향을 떠날 때 했던 자기를 바라보는 일에 몰두했다. 본래면목의 내 모습을 알 수 없다는 법정의 말에 조실스님 금봉이 받아쳤다. “본래면목은 그만 두고 당장의 그대 면목은 무엇인가?” 본래면목이란 어머니가 나를 낳기 전의 내 모습을 말한다. 법정의 뇌리에 섬광이 지나쳤다. 깨달음이라 생각하니 나를 찾아가는 좌선에 흥미가 더해졌다. 어느 날 보살 한 분이 장경각에서 내려오면서 법정에게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방금 보신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아, 그 빨래판 같은 게 팔만대장경입니까?” 법정은 보살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금장 은색으로 치장을 하고 부처님의 자비를 가르쳐 봐야 한낱 알 수 없는 글자로 남는다면 팔만대장경도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던 스승 밑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 존재에 대한 의문은 작은 깨달음과 함께 한국불교의 현실이라는 또 다른 화두로 발전하고 있었다. 타성에 젖은 한국불교의 형식적 수도생활에 대한 회의였다. 법정의 회의는 왜색을 걷어 내려는 자주불교와 민중불교를 이루고자하는 스승의 불교정화운동과 그 맥을 같이했다. 법정에게 현실참여의 기회가 왔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 불교사전을 편찬하고, 다시 불교성전을 출간했다. 빨래판과 팔만대장경이 오버랩 될 때마다 불교용어에 익숙지 않은 대중이 더 쉽게 불교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법정은 종교인으로서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연민의 정을 가지고 사회부조리를 지적하는 사회참여 의식이 요청된다”고 대중에게 설파했다.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이 청정하면 바로 그 자리가 정토다.”라는 설법에 이르면 불자의 원이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불자의 원이 현세에 있을 때 현실참여는 당연한 법도가 되는 것이다. 법정은 마침내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민주인사와 함께 민주국민수호협의회에 참여한다. 1971년이었다.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이 10월 유신을 단행하기 전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었으므로 법정에 대한 감시도 소홀치 않았던 시기이다. 종단은 어용화 되었고 현실에 참여한 법정은 같은 옷을 입은 자들로부터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법정은 좌절하지 않았다. 유신체제의 폐지와 헌법의 전면개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러서는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지 않을 수 없었다. 1975년 4월 9일. 소위 인혁당 사건의 주모자 8명은 판결 확정 후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법사상 유례없는 유신독재의 만행에 충격을 받은 법정은 무엇 때문에 출가했는지를 되묻고는 홀연히 산에 들었다. 송광사 불일암에서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법정은 유신체제를 비판했고 광주민주화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1987년 6월 항쟁에 대해서도, 새헌법의 제정에 대해서도 세상을 향한 법정의 날카로운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이 시기에 무소유가 출간되었다. 법정은 애지중지 키운 난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때 집착을 버림과 동시에 무소유의 의미를 알았다고 했다. 그러니 무소유를 출간하기 훨씬 전 이미 무소유 정신은 법정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이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세간에 전해졌다. 책은 340만부가 팔려 나갔고 웬만한 집의 서가에 한권쯤 꽂혀 있는 것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므로 법정은 무소유의 사랑과 나눔을 몸으로 실천했다. 법정은 또 같은 시기에 무소유 정신의 뒤를 잇는 일기일회의 정신을 만난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우리의 만남이 생애 단 한 번의 기회라 한다면 소홀할 수 없음은 자명해진다. 일기일회는 그런 것이다. 법정은 무소유와 일기일회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맑고 향기롭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마음과 세상 그리고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하자는 것이다.

 

법정의 무소유 정신은 천리채와 부월채 냄새 가득한 요정으로 번졌다. 길상사는 과거에 요정 대원각이었다. 대원각의 주인은 북의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더 잘 알려진 김영한 여사였다. 그녀는 마음속에 부처를 모신 후 대원각을 시주하였고 한사코 거절만 할 수 없었던 법정은 길상사를 창건했다. 법정은 무소유 정신을 공감하고 실천하는 그녀에게 염주를 한 벌 선물했다. 무소유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법정은 길상사를 창건하면서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고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길상사는 가난하지만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길 몇 번이고 기원했다.

 

법정은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옷을 벗어 던져야 했다. 대중과 소통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매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랜 시간 타성에 젖을 수밖에 없는 불일암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법정은 아무도 모르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의 외딴 오두막에 정착했다. 그리고 다시 종교에 천착한다. “오늘날의 절과 교회는 신앙보다는 세속적인 사업주의에 너무 많이 오염되어 있다. 종교가 무엇이고 깨달음이 어떤 것이며 신의 세계가 어떻다고 외치는 소리가 집회마다 넘친다. 그러나 곰곰이 귀를 기울이면 얼마나 메마르고 공허하고 관념적인 소리인지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스스로 깨달았노라고 하는 사람치고 깨달음의 행을 본 적이 있는가?” 세상을 향해 대갈하는 법정의 얼굴이 붉으레 상기됐다. 그럴수록 세속은 서릿발 같은 법정의 칼럼과 법문에 귀 기울였다.

 

언제부터인지 법정은 새벽 기침소리에 잠을 깨는 일이 많았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겼다. 자다가 깬 한 밤중의 좌정을 즐겼다. 잠들지 않고 깨어있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니 새벽기침이 고맙게 여겨졌다. 법정은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은 어느 때나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사는 일은 곧 죽는 일이며 생과 사는 결코 절연된 것이 아니다. 죽음이 언제 어디서 내 이름을 부를지라도 ‘네’하고 선뜻 털고 일어설 준비만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법정의 세속나이 마흔이 되기도 전에 쓴 유서에 있는 내용이다. 법정은 더 많은 날을 기침으로 밝혔다. 오래도록 그를 괴롭힌 것은 천식이었다. 2007년 10월 법정은 폐암 판정을 받았다. 병상에 누워서도 대운하를 중지하라는 세상을 향한 법정의 대갈은 그치지 않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법정은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히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고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다. 법정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에서 78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2010년 3월 11일. 젊은 날 고향 두륜산에 올라 대흥사를 바라보며 가진 것 다 버리고 그렇게 되고자 했던 자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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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큰스님은 그렇게 참자유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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