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을 위한 변명
: 진리의 상대성

 

 

사회에서 또는 개인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이나 쟁점을 보고 듣고 서로의 생각을 대화나 토론하면서 “삐딱선 탓느냐?”란 말을 많이 한다. 아마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기존의 통상적인 관점에서 벗어날 때 많이 쓰는 말일 터이다. ‘삐딱’이라?

 

 

사실 행동이나 생각이 ‘바르다’든지 ‘그르다’든지, ‘옳다’든지 ‘삐딱’하다든지의 판단은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관점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사고의 영역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 질 수 있는 통념적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판단은 온전히 개인적인 관점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물에 내재된 본질의 문제이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고, 또 그래 왔다. 어제의 사실이 오늘은 거짓일 수 있고, 어제의 올바른 관점이 오늘은 허위가 될 수 있다. 그 가변성의 근원은 현상이 아니라 본질에 있다. 결국 진리는 사물의 현상과, 그를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의 관점에 있지 않다. 본질에 내재되어 있고, 그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삐딱’하다는 그 자체를 잘못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거꾸로 ‘삐딱’이 오히려 올바른 것일 수 있다. 사물 자체가 갖는 본질을 허위로 볼 때 ‘올바르게’ 본다면 그것이 ‘틀린’ 것이고, 오히려 ‘삐딱’하게 보는 것이 ‘옳을’ 수 있다.

 

비록 일시적으로 잘못된 관점으로 허위가 사실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지는 것이 진리. 언제든 거짓(허위)과 진실이 뒤바뀔 수 있는 개연성. 그래서 상대적 진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역사와 사고 발전은 절대적 진리를 찾기 위한 거짓과 진실의 싸움, 그 자체에 다름 아니었다.

 

 

 

세상과 현실이 삐딱함에

 

진실을 진실로 볼 수 없고, 거짓을 거짓으로만 볼 수 없는 현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현실. 안타깝고 잘못되었어도 그래도 현실은 현실. 세상이, 현실이 ‘삐딱’한데 ‘삐딱’하게 생각하고 ‘삐딱’하게 살아감을 어떻게 비난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고 살지 않을 수 있을까?

 

‘빨리빨리’가 만연한 세상. ‘늦음’의 미학이 풍미하던 때가 있었다. 또한 ‘삐딱’의 삶이 과거 한때의 풍조라고 여겨지던 때도 있었다. 허나 ‘늦음’과 ‘삐딱’은 한때의 유행이요, 풍조로만 단순히 치부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또 그리 되어도 안될 터이다. 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삐딱한 현실이, 급함의 현실이 올바르게 바로 잡히지 않는 한 ‘삐딱’과 ‘늦음’은 (잘못된)삶 자체가 된다.

 

사회에서 리더라고 인정받는 사람들, 오피니언 리더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궤변. 쉽게 놀리는 세치 혀를 본다. 그를 둘러싸고 아부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무리들을 본다. 그를 보며 이렇게 비뚤어진 현실과 세상에서 어떻게 세상을 삐딱하게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세상이 삐딱한 것인지, 내가 삐딱한 것인지 정말로 모르겠다.

 

결코 ‘삐딱’한 현실에서 ‘삐딱’하게 생각하고 ‘삐딱’하게 삶을 사는 것이 ‘삐딱’하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를 ‘삐딱’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사람이 ‘삐딱’할 뿐이다. ‘삐딱’의 잘못은 삐딱한 세상이 올바르게 돌아 가지 않음을, 올바르게 보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데에 있을 뿐이다. ‘삐딱’이 ‘옳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 일뿐이다.

 

 

 

 

삐딱을 ‘뽀샵’하면

 

사진 찍을 때 예쁘게 보이려고 화장을 하얗게 하면 오히려 난반사를 일으켜 선명하지 않게 된다. 또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것보다 몸을 45도 정도 ‘삐딱’하게 틀고 얼굴만 정면으로 향하되 고개 역시 약간 ‘삐딱’하게 기울여야 입체적으로 나오고 자연스럽게 나온다. ‘얼짱’ 사진을 바란다면 ‘삐딱’하게 찍으란 말.

 

카메라가 정직한가 보다. 있는 그대로가 ‘삐딱’하니 제대로 찍으면 안 된다는 것 아니냔 말이다. ‘삐딱’해야 사진이 제대로 나온다? 그럼에도 사진 역시 진실을 숨길 수 있고, 거짓을 바꿀 수도 있다. 또 잘못되고 삐딱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뽀샵’이 있으니 말이다.
정말 이 삐딱한 현실을, 이 그릇된 세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그러나 진실은 감추지 못하고 거짓은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뽀샵’이 있었으면 좋겠다. 정녕 없는 것일까? 그런 카메라와 ‘뽀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