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명(행사명) : 책 읽는 풍경, 정기 북 모임
■ 일시 : 2025년5월 12일16:00~19:30
■ 장소 : 명와 고문댁
■ 참가자 : 강성자 대표 외 회원 5명, 특별회원 강병오 박사
■ 평가 및 향후 계획
- 함께 읽을 6월의 도서 : 즐거운 어른, 이옥선 지음, 이야기장수, 2024
명와 고문의 사부님, 강 박사께서 손수 공수해오신 맛있는 빵을 예쁜 바구니에 담아 정성스럽게 테이블세팅까지! 우리는 선호 아저씨보다 더 멋지심!!을 외쳤다~~ ^~^ ... (먹기 전에 사진찍어야 했음을... 매번 이렇다,)
엘리님의 서평을 소개하면서 6월의 도서 『즐거운 어른』, 이옥선 산문(이야기장수, 2025)도 얼른 시작해야겠다.
도서 : 『이중 하나는 거짓말』 (2024년) by 김애란(1980~ )
차례
프롤로그
1. 소설의 구성적 장치에 주목하며 읽기
2. 『성장소설』로 다시 읽기 시작한다
3. 중요 모티브_‘얘기’, ‘이야기’의 힘 발견하기
4. ‘사랑’에 주목하다- 선호의 사랑
5. ‘학교 폭력’
6. ‘가족’이란 무엇인가
에필로그
***밑줄 그은 좋은 문장들
***소설 속에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
-태선의 신혼집들이 이야기-
***설명이 필요한 대목
***권여선의 단편 <봄밤>에서 수환과 영경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다.
프롤로그
지우, 채운, 소리, 선호 아저씨, 뭉치, 용식이….
등장인물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키고 이야기의 흐름이 잘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무작정 페이지를 넘겨갔다. 마지막 24장에서 지우와 선호가 트럭을 타고 가는 동안에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갑자기 눈물이 솟구쳐 흘렀다.
너무 오랜만에 낯설고 귀하고 보기 드문 ‘사랑’, -사랑이라는 말조차 기억에서 잊힌 지 얼마나 오래인가-에 마음이 따뜻해져 오면서 가슴 한편이 무너지듯 나도 모르게 눈물이 뜨겁게 흘러내렸던 것이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이런 유사한 사랑이 권여선의 단편 <봄밤>에서도 있었다는 생각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n차 읽기가 시작되었다.
1. 소설의 구성적 장치에 주목하며 읽기
1~3장에서는 각각 지우, 소리, 채운 캐릭터를 간단히 스케치하는 형식으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뿐이어서 궁금증을 갖도록 한다. 4~6장에서 지우, 채운, 소리의 가족 관계와 살고 있는 집안 풍경이 대략적으로 그려진다. 7~9장에서 각 캐릭터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이고 내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부모의 캐릭터와 현재 상황에 이르게 된 경위들이 밝혀진다. 10~13장에서는 지우와 소리, 소리와 채운, 지우와 채운의 얽히는 관계를 보여준다, 14~19장에서 세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내면의 성장을 향해 다가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20~23장은 소설의 절정 부분으로 채운이 지우의 웹툰 <내가 본 것> 3화를 읽고 그동안 가졌던 오해와 의문이 풀리게 되고, 지우는 용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소리로부터 듣고 달려가다가 오토바이가 급정거하는 사고로 파출소에 붙잡히게 된다. 마지막 24장에서 선호 아저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파출소에서 나와 아저씨의 트럭을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지우는 훌쩍 어른이 되는 성장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으로 짧지만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산만하게 뿌려진 인물들의 인색한 정보가 갈수록 점층적으로 쌓여가면서 인물들의 히스토리가 밝혀지고 인물 간 관계가 구체적으로 그려지도록 구성하고 있는 것이 이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궁금증을 바로 해소시키는 게 아니라 지연시키는 전략을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지우 엄마의 죽음을 따라가 보자. 첫 장 첫 페이지에서 지우의 엄마가 최근에 죽었다는 정보만 아무런 설명 없이 제공된다. 4장에 가서 지난달 갑자기 죽었는데 실수로 발을 헛디딘 것이 사인인지 확신하지 못한다는 정도로만 설명될 뿐이다. 같은 장에서 ‘엄마가 정말 나를 위했다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는 지우의 독백은 엄마의 사인이 자살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6장에 가서야 소리를 통해 ‘지우 어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동해에 놀러 갔다 사고로 돌아가신걸’ 알게 된다. 여기서도 ‘한밤중 홀로 방파제를 산책하다 발을 헛디디셨다는’은 추가 정보가 제공될 뿐이다. 지우는 그동안 엄마 지연이 자살한 거라고 의심해 왔는데 _보험사의 심사 결과와 무관하게 엄마의 목숨값으로 무언가 하는 순간 자신이 ‘엄마의 선택’을 수긍하는 셈이 될 것 같아서였다. (P.82)_ 마지막 장에 와서야 실족사를 경찰에서 확인해 준 사실이 밝혀진다. (밤낚시꾼들이 “살려달라‘는 지연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목격담) 이와 같이 지우 엄마의 죽음은 한 번에 전후 관계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점층적으로 정보가 쌓여 마지막에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지연 전략을 써서 독자의 궁금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내고 있다.
거기에 만화 웹툰이 삽화처럼 들어가서 스릴러적인 요소가 소설의 재미를 더해준다고 할 수 있다. 수미상관 식 구성도 빼놓을 수 없다. 첫 장면은 지우가 파출소에서 보호자를 기다리며 잠깐 잠이 들면서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되고 마지막 장에서 파출소에서 선호 아저씨가 지우를 데리고 나가는 것으로 끝난다. 다시 말해, ‘파출소’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전형적인 수미상관 식 구조를 보이고 있다.
2. 『성장소설』로 다시 읽기 시작하다
지우 |
(p.8) 앞으로 대단히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어도 그럭저럭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물론 그런 일은 잠시뿐이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나며,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에게 희망이나 사랑을 줄 만큼 강하지 못해….
⬇
(p.235)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하게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 이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 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 지우는 '그렇다'라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뒤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와 용식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늘 그래 줬듯이. 활짝 펼친 그림책 앞에서 한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꾹 누르며 "빛이 나왔습니다" "낮이 생겼습니다"라고 해주었듯이. 아무리 같은 줄거리가 되풀이돼도 항상 새롭게 놀라는 척해주었듯이 말이다.
(p.228) 여러 눈송이가 차창에 붙어 섬세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드러내고는 이내 녹아 없어졌다. 그걸 보자 지우는 사방에서 내리는 눈송이가 왠지 엄마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떤 거짓은 용서해주고 어떤 진실은 조용히 승인해주는 작은 기적처럼.
(p.202~203)-‘레드 아이 아머드 스킨크’, 용식이를 통해 ‘구원’에 대해 사유함.
‘때로 가장 좋은 구원은 상대가 모르게 상대를 구하는 것’임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실제로 그 시절 지우는 용식 덕분에 그나마 한 시절을 가까스로 건널 수 있었다. 용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극적인 탈출이 아닌 아주 잘고 꾸준하게 일어난 구원. 상대가 나를 살린 줄도 모른 채 살아낸 날들. 용식을 볼 때면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동시에 지우는 다짐했다. 앞으로 용식에게 위험하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신이 반드시 구해줄 거라고.
지우 →용식이 → 웹툰 →선호 아저씨
*신은 ‘세상에 인간은 있되 구원도 없고 기적도 없고 선의도 없다는 걸 잊었지만’ (p.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엔 여전히 선의가 있다는 것을 _그것이 구원이거나 기적일 필요는 없겠지만_ 지우는 선호를 통해 체험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지우가 선호 같은 어른으로 ‘성장’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
소리 |
(P.99) 소리의 노력과 무관하게 엄마는 결국 세상을 떴다. 소리가 중학교 3학년 때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병사가 아닌 사고사였다. 엄마는 9차 항암 치료를 받으러 아빠와 병원에 가던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졌다. 소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토록 기도했는데, 사고 당일은 물론 매일 엄마 손을 잡고 앞날을 보려 노력했는데, 그 흔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엄마와 헤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마치 신이 자신을 갖고 노는 기분이었다. 패턴을 깨고 혼란을 주는 식으로. 애초에 그런 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님을 분명히 하겠다는 듯.
⬇
(P.195~196) 떠나기 전 소리가 한 손으로 미정의 묘석을 가만 쓰다듬었다. 그 순간 소리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엄마의 손을 잡은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햇볕을 받은 대리석에 미지근한 온기가 감돌았다. 정오의 햇빛이 공원묘지 안 수백 개의 봉분 위에서 차분하게 빛났다. 먼 데서 온 그 빛은 사방의 묘석뿐 아니라 소리의 머리통도 따뜻이 데웠다. 아직 자라는 중인, 여전히 자랄 것이 남은 한 여자아이의 정수리를. 그 빛은 마치 옛 화가들이 누군가의 눈동자에 빛을 새겨넣을 때 붓끝에 묻힌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 같았다. 소량이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하지만 소리는 이 순간 그저 겨울 볕이 좀 유별나게 강하다고 여길 뿐만 곳으로부터 자신이 어떤 지지를 받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자신의 손끝에서 마치 봉숭아 물이 빠지듯, 초겨울 단풍색이 옅어지듯 어떤 능력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도.
(P.130) 손에 이상을 느낀 뒤로 소리는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더 잃어갔다. 그림이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아닌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는 수단이 되다 보니 그랬다. 그런데 최근 지우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며 소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잊고 지낸 재미와 기쁨을 느꼈다. 내가 특별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무언가를 나누고 싶어 그리는 그림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소리 → 아빠, 호민 → 치유의 그림 그리기
지우나 채운과는 달리 소리에게는 친구같이 지내는 아빠가 있고 그림을 통해 재미와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더 나아가서 그림은 타인과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채운 |
(p.170) '그동안 내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인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재작년 축구 훈련 중 채운은 일부러 부상을 유도했다. 그러고 담당의로부터 더 이상 운동선수로 살기 어려울 거란 진단을 받은 뒤 남몰래 안도했다. '적어도 내가 그만둔 게 아니니까. 내가 의지가 약해서, 실력이 안 돼서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겉으로는 모든 걸 잃은 양 어두운 표정을 짓고 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을까?’
⬇
(p.154~155) 채운은 그 뒤 자신이 '새한빛요양병원 환자 학대 방지 및 조치를 위한 보호자 모임'에 연락한 사실을 말할까 하다 결국 하지 않았다. 소리로부터 아버지가 곧 회복될 거란 얘기를 듣고 오랜 고민 끝에 용기를 내 한 일이었지만, 왠지 생색을 내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였다.
(p.208) 채운은 앉은 자리에서 <내가 본 것> 마지막 화를 단숨에 봤다. 그러곤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놀랍게도 그 애가 그 밤, 어둠 속에 서 있던 자신을 몹시 부러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하나의 장면이 담겨 있었다. 채운은 오랫동안 억눌러온 어떤 감정이 무너져내리는 걸 느꼈다. 그곳에 뭉치가 있었다.
채운 → 뭉치 → 바람영어 앱 → 소리 → 엄마
채운은 지우와 소리와는 다른 깊이의 상처와 죄책감 등으로 힘든 시기를 지나왔다. 뭉치는 죽었지만, 뭉치에서 받았던 위로는 오래 기억으로 남을 것이고, 소리가 옆에서 힘이 되어 줄 것 같다. 엄마는 복역을 끝내고 나오면 채운과 다시 가족을 이루고 살 것이다.
3. 중요 모티브 ‘얘기’, ‘이야기’의 힘 발견하기
1) 이야기의 속성, 힘
(p.9) 지우에게 책을 읽어주던 어른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다정했다. 그건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아는 이들의 평온함,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얼마나 난폭하든 또는 얼마나 위험하든 주인공도 또 자신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것임을 아는 이들의 온화함이었다. 죽음을 자꾸 경험하고, 죽음을 반복할 때마다 번번이 살아 돌아온 이의 자신감 혹은 너그러움.
Q: 그럼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 끝내 살아남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 누구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야기)
A: 그런 일이 생길 순 있어도 그런 이야기가 남기는 어렵다. 뭔가 겪은 사람만 있고 그걸 전할 사람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니 적어도 한 사람은 남겨두어야 해. 한 사람은.
(p.228~~229)
지우: 아저씨는 우리 엄마 만나면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선호: 얘기
-지연이랑 얘기하고 싶어, 밤새. 우리가 함께했던 일뿐 아니라 지연이가 없는 동안 일어난 일 모두. 그리고 아저씨가 어릴 때 누군가와 무척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말들까지 다.
-지연이가 생전에 차마 못 하고 간 말들도 다 들어주고 싶어. 지연이가 그렇게 된 뒤로 그 생각을 가장 자주 해. 내가 조금만 더 많이, 더 자주 지연이 이야기를 들어줬더라면 그런 일이 안 생겼을지도 모르겠다는….
2) 지우가 써나갈 이야기
(p.233)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뒤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와 용식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늘 그래 줬듯이. 활짝 펼친 그림책 앞에서 한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꾹 누르며 "빛이 나왔습니다" "낮이 생겼습니다"라고 해주었듯이. 아무리 같은 줄거리가 되풀이돼도 항상 새롭게 놀라는 척해주었듯이 말이다.
3) 작가의 말
‘이 소설을 쓰며 여러 번 헤맸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있지만, 작가로서 이 인물들이 남은 삶을 모두 잘 헤쳐 나가길 바라는 마음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삶은 비정하고 예측 못 할 일투성이이나 그럼에도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4. ‘사랑’에 주목하다.
*선호는 누구인가?
⓵-규칙을 어겨 미안한데, 지금 내가 한 말 중 거짓은 없어.
최근 꿈속에서 지연이란 약속했어.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언젠가 네 엄마와 마주했을 때 떳떳하고 싶어. 그러니 부탁인데 지우야. 나를 떠나지 말고 나를 버려라.
⓶-지우가 집을 나온 뒤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 성탄절에는 케이크 사 먹으라고 기프티콘을 보냄.
⓷ 지우 생일 때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인근 도립 미술관에 데려감. 지우에게 표 한 장을 준 뒤 정작 선호는 가까운 솔숲 벤치에 누워 짧은 잠을 잠. (p.123)
-5개 중 4개는 진실이고 하나는 거짓 이어야 한다는 게임의 규칙에서 벗어나 선호는 5개를 모두 진실로 채운다.
1) 나는 어릴 때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2) 나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3) 나는 직장에서 잘리지 않으려고 동료를 배반한 적이 있다.
4) 나는 너희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5) 나는 너랑 살게 돼 기쁘다.
다섯 개 중에 하나조차도 거짓으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진실에 진심인 선호 캐릭터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지우, 소리, 채운의 예쁘고, 어린 사랑을 찾아 읽다.
소리 : 지우가 잠시 맡긴 용식을 돌보면서 지우의 미소를 종종 떠올린다. 사랑이 시작되는 사인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소리는 그저 그 미소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막 엄청난 사랑에 빠졌거나 한 건 아니었다. 소리는 그저 그 미소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바람이 어떻게 끝나는지, 혹은 어떤 시작과 다시 이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p.67~68)
-지우에게 선물할 용식이 달력을 만들면서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 긍정적 마음으로 전환. 동시에 지우에 대한 사랑이 커나가기 시작.
-소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뒤 사육장 쪽으로 갔다. 처음 걱정과 달리 소리는 점차 용식을 돌보는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손끝에서 무언가 새로 태어나는 듯한, 비록 큰 변화는 아니나 이따금 가슴에 바람이 불고 볕이 드는 기분이었다. 운이 좋다면 상대의 마음에도 옮길 수 있을 것 같은 미풍이었다. (p.148)
지우 : 소리에게서 작은 그림을 받음. 작문 시간에 ‘눈송이’와 연결해 지은 지우의 시에 답가로 그린 듯한 그림.
-‘소리와는 단순히 서로의 일상과 용식의 안부를 짧게 나눌 뿐인데 이상하게 문자를 반복해 읽게 됐다.’ (p.87)
채운 : 채운은 소리에게 그림에 관한 격려와 응원을 해준다.
-그리고 있지. 이따금 나 교실에서 네가 뭔가 그리는 걸 봤어. 그리고 네 그림이 근사하다 생각했어.
-앞으로도 네 손이 그런 일에 쓰였으면 좋겠어.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물끄러미 제 손을 봤다.
-네게 어울려.
5. ‘학교 폭력’
지우 : (p.46) 세상에 너랑 나랑 둘뿐이야 (=용식. 레드 아이 아머드 스킨크)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작은 사건이 큰 재난 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학교에서 늘 말이 없고 혼자 있는 편 (채운이 보는 지우)
(P.201~203) 지우 자신은 교실에서 별 존재감 없이 지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반에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지우는 아무리 열심히 움직여도 자신에게 절대 공이 오지 않는 체육 시간을 조용히 견뎠고, 급식도 따로 먹고 이동 수업 때도 혼자 다녔다. 거기 대단한 폭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곧 거대한 폭력이기도 했다. 반 친구들은 지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척하는 동시에 그런 상황에 놓인 지우를 구경했다. 그리고 그걸 주도하는 애들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지우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친구들이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결국에는 '네가 여기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없어져 버리라'라는 뜻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일 년 뒤 반이 바뀌면서 그 유치하고 가혹한 놀이는 끝났지만, 지우는 상황에 따라 자신이 언제든 지워질 수 있는 존재임을 잊지 않았다. 앞으로 군대에서도 또 직장에서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권력 놀이만큼 좋아하는 것도 없으니까.
채운 : (p.30) 세상에 우리 둘뿐이야. 알고 있지? (=뭉치. 골든리트리버)
소리 : 결벽증이 심하다며 수군댐.
(p.42) 반 아이들이 이상하다고 수군대는, 어딘가 결벽과 강박이 있어 보이는 친구였다. 애들 말로 초등학교 때는 안 그랬다는데, 소리는 다른 여자애들과 팔짱을 끼거나 손잡고 매점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체육 시간에도 아프다며 자주 빠졌고, 귀에 이어폰을 낀 채 그림에 몰두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몇몇 아이들은 “솔직히 그림 실력도 그냥 그런데 유난이야.’ ”맞아. 경기권 미대 진학도 어렵다더라“라며 쑥덕댔다.
*폭력의 잔인성;
‘반 친구들은 지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척하는 동시에 그런 상황에 놓인 지우를 구경했다.’
6. ‘가족’이란 무엇인가
1) 태주(채운이 이모)가 오래전 *태선의 신혼집들이 이야기 끝에;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p.139~141)
그러니 너도 조심해.
믿을 건 가족뿐이야.
2) 채운은 지금 저 병실에 누워 있는 사내와 자신이 피가 섞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다. 저 사람의 피가 자기 안에 흐르고 있다는 그 명백함, 그 징그러움을 어쩌지 못해서였다. '그러니 이상한 사람을 피해 도망친 곳에 더 이상한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채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피는 한 사람에 대해 혹은 그 가계에 대해 무얼 얼마만큼 말해주나?’ (p.141)
3) 태선(채운이 엄마)은 (p.180)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된다.’ 교도소에 봉사활동 온 정신의학과 선생의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음. 아들 채운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마, 채운아. (....)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라고 씀.
에필로그
---지우, 소리, 채운이는 학교 현장에서 흔히 보아 온 아이들이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뿐 달리 어떤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조용히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 웹툰에 도전하던 아이들. 때로 그들 중 뛰어난 그림 솜씨에 놀라 다시 바라본 적도 있었다. 그들이 감추고 있을 상처와 아픔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더는 다가가지 않았다. 수업은 듣지 않고 몰래 그림을 그리던 아이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솟았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무기력했던 교사였다는 자책이 뒤따랐다. 작가는 이 아이들이 어떻게든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가 본 것 같다. 전직 교사였던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훌륭하게 해낸 작가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김애란 작가 특유의 스토리를 밀고 나가는 힘 같은 것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마지막 장에서 이 메마르고 황량한,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도 낯설고 어색한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말에 눈물을 쏟게 만드는 저력은 아무 작가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세상의 밑바닥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사랑이 더 건강한 것인지도 모른다. <달려라 아비>로 인상 깊었던 작가가 그동안 많은 문학적 성취를 이룬 듯하다.
***밑줄 그은 좋은 문장들
- 마치 신이 자신을 갖고 노는 기분이었다. 패턴을 깨고 혼란을 주는 식으로. 애초에 그런 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님을 분명히 하겠다는 듯.
- 지우는 만화 속 ‘칸’이 때로 자신을 보호해주는 네모난 울타리처럼 여겨졌다.
- 알코올 향보다 훨씬 차갑고 섬뜩한 냄새였다. 향이라기보다 기운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P.73)
- 그러니 다른 사람들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을까?
- 자신의 손끝에서 마치 봉숭아 꽃물이 빠지듯, 초겨울 단풍색이 옅어지듯 어떤 능력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도.
소리로부터 용식이가 죽었다는 문자를 받는다. 용식이가 죽은 것 같아.
세상이 문득 고요해지는 문장이었다.
- 그걸 보자 지우는 사방에서 내리는 눈송이가 왠지 엄마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어떤 거짓은 용서해주고 어떤 진실은 조용히 승인해주는 작은 기적처럼.
그러다 어느 순간 그 사람이 살짝 웃었는데 얼굴 전체가 부드럽게 풀리면서 뜻밖의 표정이 드러나더라. 아마 나는 그 찰나의 이완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아. 하루 한 번 잠깐 열리는 어떤 성의 내부를 훔쳐본 기분이었거든. (p.174)
한번은 그 사람이 외출했다 들어와 또 예전 동료 욕을 했어. 참다못한 내가 ‘사람 비위 약한 거, 젊었을 때야 그렇다 쳐도 나이 먹고도 그러는 건 순수한 게 아니라 편협한 거다. (p.176) ; 김애란 작가의 나이(1980년생, 45세. 이 나이에 저런 생각에 이른다니 조금은 놀랍다.)
-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p.140)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p.182)
그런데도 나는 왜 그토록 엄마가 열렬히 삶을 원한다고 단정했을까? 어째서 삶이 누구나 먹고 싶어 하는 탐스러운 과일이라도 되는 양 굴었을까? (p.194)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만 아니라 ’있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 때 꼭 필요했다. (p.200)
- 세상에서 사람들이 권력 놀이만큼 좋아하는 것도 없으니까. (p.202)
***소설 속에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충격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
-태선의 신혼집들이 이야기-
그런데 지난번에 면회 갔을 때 언니가 그런 말을 하더라. 그땐 그냥 넘어갔는데 요즘 자꾸 그 얘기가 생각난다. 어쩌면 누군가 그걸 원해서, 산산조각이 난 유릿조각 앞에서 자신이 통곡하는 모습을 그토록 생생히 그릴 정도로 바라서 간절히 꿈꿔서, 자기가 이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p.140)
*이야기; 신혼 집들이에 대학 동기들을 초대했는데 한 친구가 주말에 시간이 안 된다고 하여 따로 평일에 그 친구만 불러 집들이하게 됨. 그 친구는 선물로 아름다운 크리스털 꽃병을 가져왔고 집들이를 무난하게 치름. 그런데 그 후에 그 친구가 이상한 얘기를 꾸며 주변에 하고 다님. 태선이 그날 술에 취해 꽃병을 깨트리곤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깨진 유릿조각을 치우지도 않고 한참을 통곡하더라는 거짓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닌 것임.
***설명이 필요한 대목
(p.105)
그 일 때문이었다. 소리가 결국 채운의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은. 물론 처음에는 거절했다. 하지만 절망적인 얼굴로 아버지 얘기를 하는 채운을 보고 소리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곤 이내 후회했다. 자신이 하면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왜인지 자신이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선의와 매혹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어떤 불경함을 느껴서. 무엇보다 자신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야기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알고 싶어서
(p.234)
-안지우, 이거 보면 연락 줄래. 묻고 싶은 게 있어.
지우가 발신자 이름을 한참 쳐다봤다. 반에서 한 번도 말을 섞어본 적이 없는 채운이었다.
채운은 무엇을 물어보고, 지우는 어떤 대답을 할까. 둘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친구가 될까?
***권여선의 단편 <봄밤>에서 수환과 영경의 사랑을 다시 생각하다
*사랑에 관하여
‘대부분의 관계는 일종의 교환 시스템이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그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질 것이다.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이를테면 욕망과는 다른 사랑 고유의 교환 구조가 있을까.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언젠가 이렇게 쓴 대로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결여는 없음인데, 어떻게 '없는 것'을 교환할 수 있는가.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주는' 일은 가능한가?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지만 대개는 서로 감춘다. 그러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한다. 그때 그의 결여가 실망스러워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 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는,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 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고 그가 아니면 내 결여를 용납해줄 사람이 없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이런 관계가 있지 않을까. 있다면,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이 관계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가 되고, 그런 상대방에 의지해 각자의 생이 견뎌질 수 있다면 말이다.’
(p.260 ~262) ‘호모 피티엔스(homo patience)’에게 바치는 경의, 신형철
출처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해설)
*** 권여선의 <봄밤> 중에서
(p.32) 수환은 처음 영경을 만나던 봄날을 생각했다. 웨딩홀에서 사람들에 섞여 있을 때부터 그는 영경을 주목하고 있었다. 비록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영경의 눈가는 쌍안경 자국처럼 깊게 파였고 볼은 말랑한 주머니처럼 늘어져 있었다. 한달 동안 노숙 생활을 했을 때 본 여자 노숙자들을 생각나게 하는 얼굴이었다. 재혼한 친구의 집에 몰려가 술을 마실 때 그는 영경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술을 마실수록 영경의 얼굴은 붉어지기보다 회색에 가까워졌고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막 마르기 시작하는 석고상처럼 보였다. 가끔 그녀는 취한 눈으로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곤 했다. 취한 그녀를 업었을 때 혹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앙상하고 가벼운 뼈만을 가진 부피감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봄밤이 시작이었고, 이 봄밤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p.30) 수환은 허깨비같이 걸어가는 영경의 깡마른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그녀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수환은 어쩌면 이게 정말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영경이 이틀 만에 돌아오겠다고 하고 외출하는 장면이다. 물론 병원에서 금지된 술을 마시기 위함이다. 수환의 예감대로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 되었다. 영경이 외출해 나간 사이 수환은 죽어갔고, 영경 역시 모텔에 쓰러져 요양원으로 옮겨졌지만, 언니와 동생을 알아보지 못하고, 수환에 대한 기억도 잊은 채였다.
(p.39)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도 영경은 여전히 수환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인생에서 뭔가 엄청난 것이 증발했다는 것만은 느끼고 있는 듯했다. 영경은 계속 뭔가를 찾아 두리번거렸고 다른 환자들의 병실 문을 함부로 열고 돌아다녔다.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영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끔 영경의 눈앞엔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 같기도 한, 놀란 듯하면서도 긴장된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종우가 대체 무슨 일이냐고, 왜 그러느냐고 거듭 묻는데도 영경은 오랜 시간 울기만 했다.
전체댓글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