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와인 셀러 전문가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글·사진 김영문
“와인은 병에 담긴 시”
헤밍웨이
포도가 익어가며 머금은 햇살의 온기, 비바람을 견디며 자란 땅의 기억, 그리고 와인메이커의 정성스러운 손길까지. 그렇게 탄생한 와인을 잔에 따르고 입술을 대는 순간, 우리는 그저 알코올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서사시를 음미하는 것이다.
6월 24일 화요일 오전, 서울시니어일자리지원센터 강의실에 완인 한 병 같은 시간이 흘렀다. 이날은 '와인 전문셀러 양성과정' 첫 번째 강의가 열린 날. 강의실 분위기는 여느 교육과는 확연히 달랐다. 한 평생 자신의 분야를 풍미했던 시니어들이 모였다. 인생 1막을 멋지게 마친 이들이 새로운 2막을 향한 설레는 마음으로 ‘와인 전문셀러’라는 이름에 도전장을 던졌다.
한 참가자는 "새로운 일을 찾다가 이 과정을 알게 됐다"며 "와인에 대한 지식은 전무하지만, 그동안 쌓아온 고객 응대 경험을 살려보고 싶다"고 참여 동기를 밝혔다.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 (주)플러스기획 관계자는 "시니어 분들의 학습 태도가 매우 진지하고 적극적"이라며 "젊은 층과 달리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고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와인 판매에 큰 장점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상 와인 판매는 단순한 판매 행위가 아니다. 고객의 취향과 분위기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이야기를 함께 곁들이는 일. 시니어에게는 누구보다도 어울리는 직무다.
총 8회차, 한 잔의 와인처럼 깊고 풍성한 교육과정
와인 전문셀러 양성과정은 총 8회에 걸쳐 진행된다. 이론 강의에 그치지 않고, 시음 실습부터 고객 응대 롤플레이까지 실전 중심의 커리큘럼으로 구성됐다.
첫날 강의는 '와인의 이해와 역사, 와인 시음 실습'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와인이 어떻게 세계인의 식탁에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강사가 설명하자, 참여자들은 마치 대학교 역사 강의를 듣는 듯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프랑스 와인은 ‘테루아(terroir)’라는 개념으로 설명됩니다. 테루아는 그 지역의 토양, 기후, 지형이 포도와 와인에 미치는 고유한 영향을 의미합니다.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재배되는 땅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개성을 가진 와인이 탄생하는거죠.”
”비교적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나파밸리 와인은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혁신적 와인메이킹’으로 불리는데요. 나파밸리 와인은 최신 양조 기술, 과학적 분석, 그리고 창의적 실험을 통해 품질과 맛을 극대화하는 접근법을 선택했습니다.”
프랑스 와인과 나파밸리 와인이 서로 다른 철학으로 접근하면서도 전통과 혁신이라는 두 가지 길이 모두 훌륭한 와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듣는 이들은 와인을 ‘술’이 아닌 ‘문화’이며, ‘철학’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이어질 교육과정도 알차다. 2회차에는 와인 종류와 테루아(terroir) 개념, 라벨 해석 실습이 진행된다. 와인의 생산 환경이 맛에 미치는 영향을 배우고, 복잡해 보이는 와인 라벨을 정확히 읽는 법을 익힌다. 이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미국, 호주,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등 주요 와인 생산국별 특징과 등급 체계를 심도 있게 학습한다.
흰 수건을 걸친 은발의 와인 소믈리에를 연상케 하는 한 참여자는 앞으로 진행될 와인과 음식 페어링, 소믈리에 실습에 대해 "음식과 와인 페어링에 대해 늘 궁금했는데, 이제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되었다"며 소감을 전했다.
수업의 백미, 네 잔의 시- 와인 시음 실습
첫날 수업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와인 시음 실습이었다. 이날 시음할 와인은 총 4종. 상큼한 화이트 와인, 깊은 풍미의 레드 와인 두 종류, 마지막으로 상쾌한 스파클링 와인까지. 참여자들은 전문가처럼 잔을 들고 빛깔을 확인하고, 향을 맡고, 천천히 음미했다.
"20년간 현직에서 엑셀과 숫자만 봤는데, 오늘 와인을 통해 오감을 깨운 기분입니다.“
한 참여자는 보고서 적듯 와인 테이스팅 노트를 정성스레 적으며 "퇴직 후에도 ‘전문성’을 갖고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무적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처럼 와인 전문셀러 양성과정 교육은 ‘전문 직무’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고 있다.
교육과정 후반부에는 실무에 직결되는 '고객 응대 롤플레이'가 예정되어 있다. 다양한 상황극을 통해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고, 친절하면서도 전문적인 와인 추천 및 판매 기술을 익히게 된다. 마지막 8회차에는 체계적인 평가와 시험, 그리고 수료식을 통해 전문가로서의 첫걸음을 축하할 예정이다.
인턴십으로 이어지는 실무 경험… 실제 취업까지 연결
무엇보다 이 교육과정의 강점은 교육 이후 실무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이다. 7월 17일까지 이어지는 교육 과정을 마치면, 7월 18일부터 10월 18일까지 3개월간 홈플러스, 백화점 등에서 실제 와인 판매 인턴십을 진행한다. 월 최대 57시간 근무로 세전 671,403원의 수당도 지급된다.
교육 담당자는 "시니어들의 풍부한 인생 경험과 성숙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와인 판매에서 큰 경쟁력이 된다"며 "인턴십 참여자 중 희망자에게는 즉시 취업 연계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인생 2막, 와인처럼 깊고 우아하게
3시간의 첫 강의가 끝난 뒤, 강의실을 나서는 참여자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홍조와 함께 묘한 자신감이 떠올랐다.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된 시간이었다.
"나이를 먹은 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것에 부담이 있었지만, 이제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오히려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참여자의 말처럼, 인생 2막을 맞이한 시니어들에게 이 과정은 와인 한 병처럼 시간이 쌓일수록 더 깊고 풍성해질 여정을 예고한다.
시니어의 축적된 경험과 지혜, 그리고 새로운 도전 정신이 만나 탄생할 와인 전문가들의 활약이 기대된다. 앞으로 이들이 매장에서 고객에게 전할 와인 이야기에는 상품 지식을 넘어, 삶의 이야기와 따뜻한 시선이 담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분명 고객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