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쏟아지는 창작자가 된다는 것
- 엔니오 모리코네와 류이치 사카모토 다큐멘터리
어린 소년이 피아노를 두드리다 말고 머리를 움켜쥐고 내달리며 울부짖는다. “마마, 마마, 음악이 쏟아져 나와요, 내 머리에서.” 러시아의 이고르 탈란킨(Igor Talankin) 감독의 1970년 작 <차이코프스키 Tchaikovsky>의 첫 장면이다.
아, 천재에겐 음악이 그냥 쏟아져 나오는구나. 엄마 품에서 어리광이나 피울 어린 나이부터 음악이 샘솟도록 운명이 지워졌구나. 반음 올림과 버금 딸림 붙은 악보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기자에겐 너무나 큰 충격과 좌절을 안긴 극 영화다.
예술 창작은 흔히 신의 영역의 도전으로 비유된다. 신이 점지한 천재가 가장 많은 분야는 음악이지 싶다. 네 살 때 부터 연주하고 다섯 살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모차르트를 대표주자로 해서, 클래식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이들은 대부분 천재, 기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제는 가장 대중적인 예술로 일컬어지는 영화 음악계에도 클래식 음악계에 뒤지지 않는 작곡가들로 넘쳐난다.
최근 세상을 떠난 두 명의 영화 음악 작곡가
최근 세상을 떠난 두 명의 영화 음악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와 류이치 사카모토(坂本龍一)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고 싶어진 이유다. <엔니오 : 더 마에스트로 Ennio>(2021)와 <류이치 사카모토 : 코다 RYUICHI SAKAMOTO : CODA>(2017)가 그것이다. 1928년생인 엔니오 모리코네 2020년, 낙상으로 인한 대퇴부 골절상으로 입원 중 91세 일기로 별세했고, 1952년생인 류이치 사카모토는 2023년, 오랜 암 투병 끝에 71살로 생을 마감했다. 예술인 부고(訃告)를 접하면 반드시 어떤 병으로, 몇 살에 세상을 버렸는지 확인하게 되는데, 그리 먼 미래가 아님을 감지해서겠지.
두 사람의 영화 음악에서 공통점을 찾는 건 어렵지만, 음악 여정에선 비슷한 면을 볼 수 있다. 모리코네는 트럼펫 연주자로 출발해 클래식과 영화, 팝 음악 작곡과 지휘를 병행했다. 영화 음악만 무려 500여 편을 남겼는데, 선율이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부지기수다. 사카모토도 밴드 활동으로 시작해 클래식과 현대 음악, 영화 음악 작곡과 지휘를 아울렀고, 배우로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영화 음악 작곡은 114편에서 멈추었다.
아카데미상과의 인연을 정리하자면. 모리코네는 아카데미 영화 음악 작곡상 후보에 5번이나 올랐지만, 2016년에야 <헤이트풀8 The Hatefu l Eight>으로 트로피를 쥘 수 있었다. 그간의 부당한 대접이 미안해서인지 아카데미는 2007년 명예상을 안겨준 바 있다. 사카모토는 1988년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로 아시아 최초 아카데미 영화 음악 작곡상을 받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음 준비가 반듯했다. 모리코네는 친구, 가족, 특히 아내 마리아에게 전하는 사랑과 작별 메시지를 담은 부고장을 남겼다. 사카모토는 자신의 장례식 연주곡 리스트에 모리코네가 작곡한 영화 <1900년>의 OST ‘Romanzo’를 포함 시켰단다.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주세페 토르나토레 Giuseppe Tornatore가 감독한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이보다 혼란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료가 쌓인 방에서, 엔니오가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들으며 홀로 지휘하는가 하면, 작곡 멜로디를 모두 기억해내며, 음악 인생을 회고한다. 워낙 많은 작곡을 해서 “사람을 두고 일했다.”는 말까지 들었다는 데, 그의 성실함은 평생 아내 마리아 Maria Travia에게 헌신한 데서도 짐작할 수 있겠다.
클린트 이스트 우드 Clint Eastwood에서부터 조안 바에즈 Joan Baez까지, 그를 찬양하는 음악인과 배우들 면면이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다. 그가 참여한 영화에서 맞춤한 장면을 찾아낸 편집자의 분골쇄신(粉骨碎身)은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음향 확인을 위해서라도 스피커 좋은 극장과 기기 관람이 예의다.
이 다큐멘터리의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역시 주세페 토르나토레와의 대담집 <<엔니오 모리코네의 말: 영화를 음악으로 기억하게 한 마에스트로의 고백 Ennio : un maestro>>(마음산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나는 항상 자율성을 추구하고, 영향받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뭔가에 영향받는 것이 항상 두렵고, 무의식적으로도 그로 인해 괴로울 수 있어요. 내가 받는 모든 영향에는 가르침과 함정이 들어있는데, 뭘 할 수 있을까요?” 이처럼 자신을 경계하며 살았기에 영화 팬이 행복할 수 있었겠지.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스티븐 노무라 시블 Stephen Nomura Schible 감독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8)는 2012년,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사카모토가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음악 작업으로 활동을 재개한 전후 5년여를 기록한다. 후쿠시마 지진과 쓰나미에 살아남은 망가진 피아노로 연주하고, 핵발전소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석해 발언하고, 암 판정을 받은 당시 심경을 고백하고, 숲과 남극 등을 다니며 소리를 채집해 컴퓨터와 피아노로 작곡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 활동 영상과 영화 출연 장면 등을 곁들여 소개된다. 9.11 테러 당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그가 찍은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 등의 사진을 보면, 사진작가로서의 재능도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사회운동가, 설치미술가, 출판인으로도 활동한 사카모토를 확인 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검버섯 가득한 얼굴의 사카모토는 곱게 깎은 연필을 들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린다.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지구 이 끝에서 저 끝을 방문하는 집념을 보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직업은 예술 창작뿐이구나, 싶다. “암이 재발해 죽을지 모르나, 언제 죽더라도 후회 없도록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남기고 싶다.” “우리는 소리에 둘러싸여 산다. 그 소리를 음악으로 만들고 싶다.” “날마다 조금씩 피아노를 치려 한다.”며 웃는 얼굴로 사라진다.
다큐멘터리 여운을 연장하고 싶다면, 2022년 7월부터 2023년 2월까지 일본 문예지 ‘신초’에 연재한 사카모토의 유고집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위즈덤하우스)를 권한다.
또 하나, 2023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2023년8월10일 - 15일)는 <남한산성>(2018) OST로 우리 영화계와도 인연을 맺은 사카모토를 제19회 제천영화음악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사카모토 류이치 트리뷰트 콘서트 Ryuichi Sakamoto Tribute Concert’를 연다. 여름휴가를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보내는 건 영화 팬의 기쁨이자 의무다.
〈출처 :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시민기자단 옥선희 기자(eastok7@naver.com)